본문 바로가기
여러가지 것들/IT

욥기에 대해서 알아보자

by noo min23 2019. 4. 17.
반응형

야훼께서 욥에게 대답하셨다. "전능하신 이와 변론하는 자야, 어찌 물러서려느냐? 하나님을 비난하는 자야, 대답하여라." 욥이 야훼께 대답하였다. "아, 제 입이 너무 가벼웠습니다.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사옵니까? 손으로 입을 막을 도리밖에 없사옵니다. 한 번 말씀드린 것도 무엄한 일이었는데 또 무슨 대답을 하겠습니까? 두 번 다시 말씀드리지 않겠사옵니다."
욥기 40장 1~5절(공동번역성서)

구약성경의 한 대목.

북부 아라비아의 '욥(איִובֹ, 이요브)'이라는 사람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1] 성경 중간 부분에 있지만, 시간대는 창세기 부근이다[2]. 성경은 시간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다만 저술 시기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 다른 성경들과 달리 욥기는 그러한 유추가 거의 불가능하다 보니 욥기의 추정 저술 연대는 기원전 19~21세기경에서 기원전 1세기경[3](...)까지 중구난방 흩어져 있다.

아랍어에서는 욥을 아이유브(ايوب)로 부른다. 살라흐 앗 딘의 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하며, 결과로 살라흐 앗 딘이 창건한 아이유브 왕조(أيوبيون)란 이름 자체의 유래가 되었다.

구약성경의 다른 문서와는 다르게 액자식 구성[4]인데 운문체로 쓰인 본문 앞뒤로 산문체로 쓰인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달려 있다. 하느님과 사탄이 대화하거나 중반부부터 친구놈들과의 기나긴 이야기가 나오는 등 고대 그리스의 희곡 한 편을 읽는 듯 착각할 만큼 문학 양식상 색다르다.

특히 욥의 재앙 이후에 친구놈들과 논쟁을 벌이는 부분의 경우, 어떻게 보면 흔한_현대_네티즌들의_키보드_배틀.txt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양상이 낯익다.(…) 즉 문제제기 → 겸손한 태도로 주장 시작 → 의견 대립 → 논쟁 과열 → 빈정 상함 → 자신이 무조건 옳다고 억지 → 상호 간의 인신공격 → "됐습니다, 더 이상 당신과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시전(…) → 게시판 관리자에게 판단 요구 → 열기가 식어가던 중 눈팅회원 뒤늦게 난입[5] → 관리자가 나타나 중재 후 회원 제재조치 → 당초 떡밥이 되었던 문제는 그대로 맥거핀화(…)[6]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욥의 세 친구들과 같은 인과응보식 고난의 개념은 잘못됐다.는 점이다. 홍수 나면 무조건 하느님이 벌을 내린 거라는 헛소리 등 이들은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친구를 향해, 처음에는 1주일간 말없이 울면서 욥과 같이 있어주었지만,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며 고난에 절규에 할 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래도 네가 뭘 잘못한 게 있으니까 합당한 벌을 받은 거겠지, 어서 반성하고 다시 착하게 살아"(…) 의 성질머리 벅벅 긁는 상큼한 망언만을 반복할 따름이었다. 고난의 개념을 단순히 죄악에 따른 벌로 봤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욥에게 세 친구가 와서 이런저런 충고하는데 세 친구놈들이 다 이야기하고 나면 제32장에 '람 종족 출신인 부스 사람 바라켈의 아들 엘리후' 란 사람이 갑툭튀한다. 욥기 본문상에서는 자신이 앞서 말한 욥의 세 친구보다 나이가 어려 먼저 나서기 어려웠기에, 지금껏 묵묵히 지켜보다가 이제야 말을 꺼낸다고 말한다. 여기서도 나이가 계급인가.[7] 엘리후는 양쪽 주장의 문제점들을 짚어내며 양비론을 펼치는데, 엘리후가 옳은 인물인지, 틀린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후세에 평이 갈리는 편이다.
2. 내용[편집]
어느 날, 사탄이 하느님에게 내기를 걸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상에 '욥'이라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깊은 사람이 있는데, 욥에게 재앙을 가져다주면 하느님을 욕하게 될 것인지 아닌지 내기하게 되었다. 우선 사탄이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보십시오. 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할 것입니다."라고 부추기고, 하느님은 "좋다! 이제 내가 그의 소유를 모두 네 손에 부친다. 그러나 그의 몸에만은 손을 대지 마라." 라고 하며 허락하고, 사탄은 욥에게 재앙을 가져다준다.[8]

사탄은 우선 사고와 전염병으로 욥의 재산을 모두 날려버린다. 그 다음에는 도적떼가 몰려들게 하여 낙타를 죽이고 집이 무너지게 하여 욥의 자식들까지 몰살시켰다.[9]

이럼에도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욥기 1장 21절(공동번역성서)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재산과 자식들 모두 하느님이 주신 것이니 이를 거두는 것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겼다.

사탄이 다시 하느님을 만났을 때 하느님은 "너는 내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그는 여전하지 않느냐? 네가 나를 충동하여 그를 없애려고 했지만 다 헛일이었다."고 하자 사탄은 "사람이란 제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내놓지 못할 것이 없는 법입니다.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뼈와 살을 쳐보십시오. 제가 보장합니다. 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할 것입니다." 라고 하자 역시 하느님은 "좋다! 이제 내가 그를 네 손에 부친다. 그러나 그의 목숨만은 건드리지 마라." 라고 한다. 이에 사탄은 마지막으로 욥을 피부병(부스럼)에 걸리게 했다.

재산과 자식들을 모두 잃고 피부병에 걸려 기왓장으로 몸을 긁는 불쌍한 신세가 된 욥을 향해, 욥의 아내는 "하느님을 저주하고 걍 죽어 버리라"고 악담한다.[10] 그러나 욥은 태연자약하게 "바보같은 소리. 하느님께서 복을 주셨으니 재앙을 내리시는 것도 당연하지 않소?"라고 대답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ob_friends.jpg 
병에 걸려 드러누운 욥에게 친구들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 나아마 사람 소발, 수아 사람 빌닷이 찾아와 처음에는 욥의 상황이 너무 참담해서... 말로는 위로도 못 하고 옷을 찢으며 울면서 그냥 1주일간(!) 밤낮을 말없이 있어주었다.[11] 하지만 욥이 왜 자기가 고난을 겪는지 이해를 못 하고 절규하자, 드디어 키배가 시작됐다.

"이렇게 화를 당하는 것을 보면, 네가 하느님께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으니 인정해!!"라고 강요하지만, 욥은 "내 잘못이 이렇게 큰 재난당할 정도로 크지 않은데[12] 내가 이토록 혹독한 재앙을 당함은 억울한 일이야!!"라고 소리 높여 주장한다. 그 다음은 욥과 친구들의 언쟁으로 욥과 친구들의 언쟁이야말로 욥기의 본문으로, 욥기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담는다.

7일 후 욥은 마침내 입을 열고, "차라리 내가 태어난 날 재앙이 일어나 내가 죽었으면, 내가 죽어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이라며 자기가 태어난 것 자체를 저주하고, 그 말을 들은 엘리바스는 "너는 그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을 고통에서 구해주더니 본인이 고통에 빠지니 그대로 절망하는 구나."라고 한탄하며, "네가 무슨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벌을 내리시는 모양이다. 그러니 용서를 구해라. 설사 벌을 받는다 해도 벌이 끝나면 반드시 복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욥은 "나는 이런 끔찍한 벌을 받을 만큼 하나님께 잘못을 한 기억이 없다"라고 반박하고, 이어서 "하느님 저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고, 오래 살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그러니 지금 말하겠습니다. 왜 저를 이 지경으로 만드셨습니까? 차라리 죽는게 낫겠습니다!"라며 항의 가까운 기도를 한다. 그러자 빌닷이 "불평만 하고 있을거냐? 하느님이 정의와 공의를 어기실 분이냐? 네 자식들이 죄를 지어 벌을 받는 것일지도 모르니 네가 회개를 해라. 그럼 넌 다시 복을 받고 행복해질 거다"라며 욥에게 반박한다.

그러나 욥은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세상에 어딨냐? 그 분이 뭘 하시겠다 하면 막을 수 있는 자가 어딨어? 차라리 벌을 받아도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비는 게 낫지."하고 다시 "하느님. 당신은 사람의 시선으로 판단하는 분도 아니시고, 제가 악하지 않은 것도 아시면서 왜 이런 재앙을 내리십니까? 얼마 안 남은 인생 좀 편하게 보내게 해주시면 안됩니까?"라고 다시 항의기도를 한다. 그러자 소발이 듣다가 마침내 꼭지가 돌았는지 "네가 지금 하느님 앞에 깨끗하다고 하는거냐? 네가 하느님 생각을 무슨 수로 알아? 죄를 범했으면 버리고 마음을 바로잡아라. 그러면 네가 다시 일어나게 될거다"라며 욥을 꾸중한다.

욥은 "이야,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네? 내가 바보냐? 나도 너희만큼 알아. 너희가 하느님의 대변자라도 되냐? 나는 그분이 날 죽인다 해도 내 행위에 대해 증언 정도는 할 수 있어."라고 대놓고 말하며, 또 "하느님, 저를 그냥 덮어놓고 원수 취급하면서 벌만 내리지 마시고 그냥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시원하게 알려주십시오. 아니면 저를 지옥에 보내셨다가 화가 풀리면 그 때 다시 데려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

엘리바스는 "네가 아주 하느님 섬기기를 때려쳤구나. 하느님이 너한테 하시는 말이 다 별 것 아닌 말이냐? 하느님이 악인을 용납하고 의인을 버리는 분이시냐? 세상에 하느님 보시기에 깨끗한 사람이 어딨냐? 악인은 하느님께 대항하지만 오로지 망하기만 할 뿐이야"[13]라고 욥을 비난한다.

욥은 다시 "너희는 나한테 위로가 아니라 비난을 하러 온 거냐? 나도 너희들처럼 할 말 많고 똑같이 반론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래봤자 이 고통이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또 "하느님, 제 친구들까지 지금 저를 조롱하고 이 모양입니다. 하느님이 제가 무죄하다는 증인이 되어 중재해 주십시오"라고 아예 변호사 고용신청을 넣는다.(...) 빌닷은 이젠 아주 할 말이 없다는 듯 욥에게 악인의 끝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참혹하다며 욥을 비난하고, 결국 이 설전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여기서 특징이 있는 부분은 욥의 친구 셋이 인과응보 논리에 의거해, 욥에게 죄악이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욥이 자신의 정당을 논리로 초월하는 하느님이 내린 고난을 한탄하고 하소연한다면, 친구들은 하느님이 너에게서 부정(否定)을 보았기 때문에 벌했을 것"이라는 논리로 욥을 공격한다. 이 키배 상황만 보면 위로하러 온 게 아니라, 욥을 나쁜 놈으로 몰아가 회개하게 하려는 의도로 온 듯하다.

마지막에 갑툭튀한 엘리후는 인과응보적 논리에서 탈피함과 동시에, 욥의 태도가 신에 대해 불경스럽다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인다.[14] 이에 욥은 하느님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자.

정말로 하느님이 나타났으며 하느님은 욥의 고통에 대답하는 대신, 당신의 초월적인 권능을 감히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답한다. 여기서 레비아탄, 베헤모스 불 뿜는 공룡 이야기도 나온다.[15]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렇게 세상물정을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했느냐? 그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어디에 땅을 받치는 기둥이 박혀 있느냐? 그 누가 세상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중략)
바다가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 그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바다를 구름으로 싸고 먹구름으로 묶어둔 것은 바로 나였다. 바다가 넘지 못하도록 금 그어놓고 문에 빗장을 내려놓은 것은 바로 나였다. (중략)
네가 언제고 동이 틀 것을 명령해 본 일이 있느냐? 새벽의 여신에게 "이것이 네 자리다." 하고 일러준 일이 있느냐? 땅의 옷깃을 휘어잡고 불의한 사람들을 그 속에서 털어내라고 명령을 내려본 일이 있느냐? (중략)
네가 천상의 운행 법칙을 결정하고 지상의 자연 법칙을 만들었느냐? 너는 구름에 호령하여 물을 동이로 쏟아 땅을 뒤덮게 할 수 있느냐? 네가 "나가라."고 명령하면 "알았습니다." 하며 번갯불이 번쩍 퉁겨 나가느냐?(중략)
욥기 38장(공동번역성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욥은, 하느님의 권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순응했다.
욥이 야훼께 대답하였다.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린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욥기 42장 1~6절(공동번역성서)

결국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은 욥은 하느님께 이전보다 크게 은총을 받아, 전보다 많은 재산과 많은 자손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욥의 모든 재산이 두 배로 늘어났다. 내기 이전 양 7,000마리,낙타 3,000마리, 소 500마리, 암나귀 500마리였던 재산이 양 14,000마리,낙타 6,000마리, 소 1,000마리, 암나귀 1,000마리로 늘어났고 욥이 그 이후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아[16] 4대까지 140년 동안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욥이 고난을 받았을 때의 나이가 70살(140년의 절반)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죽은 자식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피엔딩인지 의문이지만[17]

사실 하느님의 편을 들었다고 할 만한 욥의 세 친구들이 하느님에게 "너희의 말한 것은 내 종 욥의 말같이 알맞지(right) 않았다." 라며 단죄받지만, 욥이 그들을 배려해 빌어준다면 용서해 주겠다고 한다. 욥기 글쓴이가 무슨 생각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 욥기의 주제가 단순히 신앙을 계속 유지하면 복 받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하느님에게 알맞지 않다고 직접 까인 욥의 세 친구들 측의 의견이 '신앙을 계속 유지하면 복 받는다.' 쪽이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피해자나 낙태아를 위시해 현실에서 실패하거나 미온한 채 사망한 사람이나 별다른 잘못도 없었는데 고통받고 보상받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실재하는 상황에서 믿으면 복받는다는 논리가 알맞을 리가 없으니,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결론이다.

욥의 세 친구들은 '하느님이 있다면 왜 선한 사람이 고통받는가?'라는 질문에 똑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고통받는 놈이 악한 놈(첫째 친구 엘리바즈)이라든지 고통받는 놈의 관계자, 자식들이 악해서 연좌로 걸렸다든지(둘째 친구 빌닷) 고통받는 놈의 벌이 그가 지은 죄보다는 가벼우니 입 닥치라는 식(셋째 친구 소발)의 말장난으로 대답하여 질문을 회피했고 이는 당연히 알맞은 대답이 될 수 없었다. 특별한 악의도 없었는데 고통받고 보상받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좋은 일만 생긴다는 논리와도 다른 결론이다. 즉, 욥이 복받은 내용이 서술된 에필로그는 "신의 행동을 예측하려고 하거나 토다는 것은 불경하며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뜻
3.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편집]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개신교 성경 개역개정4판)
처음에는 보잘것없겠지만 나중에는 훌륭하게 될 것일세. (공동번역성서)
자네의 시작은 보잘것없었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 (가톨릭 성경)

욥기 제8장 제7절에 욥의 세 친구 중 하나인 빌닷이 말한 이 구절이 유명하다. 이걸 사업 번창하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개업하는 날 가게에 걸어두는 개신교 신자가 상당히 많다. 하지만 앞의 구절들을 고려하면 그다지 긍정적인 맥락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 빌닷은 "자네 아들들이 몰살당한 것은 걔네가 뭔 죄를 지어서일 것이고, 자네가 죄가 없다면야 그분이 신세를 고쳐주시겠지"라는 선인선과(善因善果)의 인과응보(因果應報)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욥은 하느님과 사탄의 내기에 휘말려 재산을 털리고 자식을 털린 사람이다. 일각에서는 '오직 성경'의 이데올로기를 이어받은 한국의 개신교가 오히려 성경에 취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의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4. 해석[편집]
욥기의 주제를 이야기하면 '하느님은 왜 착한 사람이 고통받을 수 있게 하였는가.'이다. 또 의인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여야 하는지를 중점으로 선하고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있는데도 의로운 사람이 고통받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생각할 수 있다.[18]

사람이 겪는 고통을 대상으로 해 사람들이 희망하는 고전이 될 만한 내용이 있는 관점은 "나쁜 짓을 하면 벌받거나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욥기의 저자는 이 문제를 두고 욥이라는 사람을 이용해 "착한 사람이 고통받을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나쁜 짓을 해서 벌받는다고 하는데, 이런 관점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나쁜 짓을 했으니까 벌받는다고 해석할 이유가 된다. 윤회가 빈부격차를 설명하는 방법[20] 이에 욥기의 저자는 고통받는 사람이 선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기독교도는 욥기가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라고 희망을 주는 내용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이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제시한다고도 간주한다.

한편 이 이야기에서 가장 크게 걸리는 부분이 있는데, 욥이야 나중에 부와 가족을 되돌려 받으니 됐다고 해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욥의 가족들과 하인들은 어쩌라는 것인가이다. 하지만 욥의 가족들이나 하인들이 죽지 않는다면, 욥이 극을 관람하듯이 인상 깊고 감동스러운 재앙으로 나락에 떨어져 신세를 한탄한다는 구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의 중심 내용이 '고통받는 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고찰' 대신, '고통받지만 지상에서 언젠가 보상받을 수 있는 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고찰'로 좁아지게 된다. 이럴 때 보상받지 못한 고통받는 선한 사람들을 무시하게 되고 원래 주제와 고찰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가 완전히 무의미해진다. 여기서 자세히 생각해보자. 그들 모두가 확실하게 결백했는가? 특히 아내 분은 욥에게 신성모독과 자살을 부추기시는 성향이 (욥기 2장 9절)...[21]

세상을 떠난 하인들과 가족들은 결백하지 않았으니 문제없다는 소리는 욥기에서 그토록 설명했던 바를 거스르는 억지이자 무지다. 살아남아 재기한 욥마저도 본인이 결백해서 기회를 얻은 게 아니다. (실제로 욥은 스스로가 결백한 사람이 아님을 인지하고 시인하고 있다.) 세 친구와 욥의 논쟁에서 알 수 있듯, 사람이 겪는 고난과 불행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질 뿐, 절대 개개인의 잘못에 상응하는 처벌이 아닌 것이다. 위에서 주구장창 설명한 그거다. 따라서 욥의 하인들과 가족들 또한 욥과 마찬가지로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은 아니다. 자세히 생각해보자. 하느님이 '욥의 가족들과 하인들을 벌하기 위해' 사탄을 보낸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견들이 따로 있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욥의 재산이 모두 배증했는데 아들과 딸은 배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양 7,000마리가 있었는데 마지막 부분에 늘어난 양을 보면 양이 14,000마리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 나온 아들 7명과 딸 3명은 아들 14명과 딸 6명이 되는 게 아니라, 그대로 아들 7명과 딸 3명이다. 이 부분을 다룬 해석은 여러 가지이고 넷으로 대분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창세기 인근)의 자녀와 하인은 현대의 가족의 개념과는 달리 '재산'의 개념에 가까웠을 수 있다. 이 일화에서 하인과 가족들은 인격체가 아닌 욥의 재산으로 등장한다는 주장이다. 말 그대로 가축이자 집 같은 존재로 취급. 성경에 묘사된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인권'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이나 아이들, 하층민들은 가장으로서 기능하는 자유민 성인 남성에게 부속된 자본으로 여겨졌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욥의 가족과 하인들을 욥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개인'으로 인식하지만, 전근대인들의 눈에는 재화로 환산할 수 있는 '자산'에 불과했다는 것. 결국 이 또한 성경이 서술된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혹자를 좇으면, 부성애 같은 개념은 중세 이후 대두된 사람으로 당연히 얻는 기본권과 생명 존중 사상에서 비롯되어 퍼진 것으로, 사람의 본능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주장하며 이 이론을 지지하나 위에서 설명했듯 '재산이 모두 배'가 된 것에 비해 자녀의 수는 그대로이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며, 창세기 시절이라고 해서 꼭 그런 식으로 여겼다고 하기에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관계 등을 고려할 때 조금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런데 자식들에 관해서, 욥기는 히브리어로 저술되었는데, 여기서 아들 일곱은 히브리어로 7의 배수로 해석되기도 하므로 조금 감안해야 한다.

2. 신앙이 깊고 순명하는 욥은 자손의 생명도 하느님이 준 것이므로 거두어 가시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 새로 얻은 자식들이나 잘 키우자라고 여겼을 수 있으나 이것도 욥이 절망하는 원인과 앞뒤가 맞지 않고 아무리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도 현대에 사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납득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생각이다.[22]

3. 실제로 부활했다. 허구에 가까운 이야기이라서 가능할 법도 하나, 죽은 사람이 그것도 최소 10명 넘게 부활했다면 아무리 기적이 많이 일어난 창세기 당시 일이라도 너무 대단한 사건이다. 욥기 저자가 이것을 대상으로 해 크게 쓰지 않았을 리 없다.

4. 다른 소유물은 바뀐다 하더라도 2배면 괜찮지만 자식은 바꿀 수 없다. 욥의 이전 자식들과 새 자식들이 모두 천국에 있으면 갑절이 맞는다.설교 내용 넷 해석 중 가장 훈훈하고 타당성이 있으며 이를 근거로 보았을 때, 욥의 모든 자식들은 천국에 갔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위에서도 적었듯이, 욥기의 주제(의인의 고통)를 '언젠가는 지상에서 보상 받을 의인의 고통'으로 줄이지도 않는다.

욥의 세 친구들의 대화는 인과응보의 논리에 따라 욥에게 숨은 잘못이 있다거나 지나치게 오만하다고 비난하는 내용이라면 엘리후는 다른 각도, 즉 사람이 하느님보다 과소거나 하느님이 사람에게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주장한다.[23] 

엘리후가 하는 말은 조금 더 후기 사회상을 반영하기도 하고 다른 친구들의 말에는 욥이 다 대답해 주는데 엘리후의 말에는 욥이 대꾸하지 않는다는 점, 어투가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고 수많은 아람어 단어를 사용하는 점, 그의 논증 바로 뒤에 하느님이 대답한다는 점 등을 들어, 이 부분은 조금 후대에 본문에 삽입한 부분이고 이스라엘 민족 전통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주위의 설화에서 따오거나 혼합된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욥기는 성경의 다른 장들과 매우 다른 내용으로, 저술 시기는 바빌론 유수 이후로 추측된다. 성경의 다른 장들이 이스라엘의 전성기에 작성되어 하느님이 권선징악을 하는 존재로 묘사되어 왔지만(신명기다운 역사관), 욥기는 이스라엘이 고난을 겪을 때 작성되어 하느님은 우리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왜 이러한 징벌을 내리셨는가 하는 온 민족이 관계된 질문을 하는 것이다.(욥기다운 역사관)

그런데도 욥기가 성경에 편입된 이유는 "하느님이 있다면 왜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가?" 하는 세계 모든 사람의 유구한 궁금증 때문이다. 욥은 "그런데도 그는 나의 걸음을 낱낱이 아시다니.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 (욥기 23장 10절, 공동번역성서)라고 고백하며 고통의 이유를 짐작한다. 하느님은 나중에 "야훼께서 욥과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데만 사람 엘리바즈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너의 두 친구를 생각하면 터지는 분노를 참을 길 없구나. 너희는 내 이야기를 할 때 욥처럼 솔직하지 못하였다." (욥기 42장 7절, 공동번역성서)라고 욥의 신학관을 입증해준다. 이를 보았을 때 고통의 목적이 단련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욥기는 결코 완전히 선한 사람은 없다고 이 질문 자체를 반박하고 있다(!) 욥기에서 하느님은 레비아탄, 베히모스 같은 자연의 다양한 경이를 보여주면서 사람의 한계를 지적한다. 사람이 인식하는 범위와 논리 체계를 벗어난 것들을 이용하여, 불완전한 사람은 하느님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하느님이 욥에게 던지는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네가 나의 판결을 뒤엎을 셈이냐? 너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 작정이냐?" (욥기 40장 7~8절, 공동번역성서)는 말은 곧 "네가 옳기 위해 나를 심판하겠느냐?"개기냐?라는 질문이다. 심지어 하느님이 직접 인간인 욥에게 "너 나랑 입장 바꿔서 니가 하느님 한 번 해볼래?" 라고까지 한다.(…) "나 착한 사람이야"라는 주장은 결국 "창조주가 틀렸어"라는 교만한 맥락과 상통한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착한 사람'이 아니며, '착한 사람'이 될 수도 없다. 사람이 선해지고 악해지는 것은 주님의 뜻에 따라 각기 선한 일면과 악한 일면이 발현되는 것일 따름이다. 사람은 스스로의 의지로 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낱 인간들이 규정해놓는 모순되고 미온한 도덕을 의식하며 사는 것은 주님의 권능과 뜻을 왜곡하고 거스르는 죄다. 인간은 완전한 자유의지와 본능에 따라 행동할 때 진정으로 주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으며, 그 크신 계획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욥기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같이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보상을 기대하거나 악한 일을 한다고 해서 징벌을 두려워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건, 욥기는 인간이 하느님을 이해하는게 아예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자들에게 성령을 아낌 없이 부어주는 신약성경을 제외하더라도 구약성경 내부에서 이미 인간이 하느님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요엘에서는 하느님이 말세에 당신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부어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외의 부분에서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영'이 임하는 부분도 존재한다. 아니, 그런건 둘째 치더라도 인간이 하느님을 아예 이해할 수 없다면, 욥부터가 어떻게 하느님과 대화하고 그 뜻이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즉, 욥기의 주제는 인간이 하느님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전부는 이해할 수 없고, 네가 선하더라도 고통을 받을 수 있지만, 분명 거기에는 하느님의 선한 뜻이 있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라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욥이 겪었던 인간의 생각으로 보기에는 불합리한 상황도 어떤 선한 뜻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해 믿음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그러면 나의 옳았음을 아시게 될 것이고, 나는 나대로 승소할 수 있을 것일세. 그런데 앞으로 가보아도 계시지 않고, 뒤를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는구나. 왼쪽으로 가서 찾아도 눈에 뜨이지 아니하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도 보이지 않는구나. 그런데도 그는 나의 걸음을 낱낱이 아시다니.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

위의 내용은 욥기 23장 7~10절(공동번역성서)로 '욥기의 전체적인 주제'를 함축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위치와 의미가 있는 편으로, 이것을 대상으로 한 해석 중에 제일 특이한 해석으로 철학자 겸 심리학자인 카를 융이 적은 책 '사람의 상과 하느님의 상'에 포함되어 있는 '욥에의 응답'이란 것이 있다. 욥기를 대상으로 해 흥미가 있다면 한번은 읽어볼 볼 가치가 있다.

슬라보예 지젝과 존 밀뱅크의 공저 <예수는 괴물이다(The Monstrosity of Christ)>에서 지젝은 G.K 체스턴턴의 "욥기 개설"을 인용하여 욥이 하느님의 침묵에 만족한 중요한 이유는, 하느님이 욥 자신의 고통에 축어적인 대답 대신 질문과 침묵을 동반한 더 큰 수수께끼로 덮어서 욥은 "하느님의 절규"를 알게 되었으며 결과로 심판대에 오른 것은 욥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라고 해석한다. 욥의 점잖은 복수 자세한 것은 본서를 읽어볼 것.

여담으로 플롯상 도입부에 나왔던 사탄이 중간에 실종되는 문제가 있다. 성서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과 사탄과의 대결은 단순한 문학적 기법으로 봐야 한다고 한다. 욥기 자체가 어느 정도 문학성을 띠는 서적이지만, 앞부분은 특히 그런 부분이 더 심하다고. 욥이 고난을 받은 걸 실제로 있었던 일로 보더라도 하느님과 사탄의 대화를 사실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근데 "아, 누가 있어 나의 말을 기록해 두랴? 누가 있어 구리판에 새겨두랴? 쇠나 놋정으로 바위에 새겨 길이길이 보존해 주랴?" (욥기 19장 23~24절, 공동번역성서) 하고 외치는 욥은 상당히 자신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우리가 알기 원하는 듯 들린다
5. 욥기의 논쟁 해석[편집]
욥기는 선한 사람[24]이 고통에 빠지고, 남이 보기에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부터 논쟁을 시작한다.[25] "욥은 명백히 선한 사람이다."란 명제를 항상 참인 것으로 밝히고 시작한다는 것에 주의하자.

선한 사람인 "욥"이 빠진 고통을 인과응보적 개념으로 단죄한 3명은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모르는 친구를 향해 자의적으로 인민재판을 한다. 욥은 명백히 선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욥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욥의 고통을 욥의 잘못으로 돌리는 논리를 풀어놓고, 욥은 이것을 반박한다. 이 4명의 사람은 4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며, 해당 부류의 사람들 특유의 주장을 펼치고, 해당 부류다운 오류를 범한다. 이들 중에서는 율법에 능한 자[26]도 있지만, 잉여한 인물도 있다. 이 세 부류의 사람은 하나같이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그것이 욥에 의해 반박되고 있다. 

욥의 친구들의 주장은 계속해서 욥에게 반박당하며, 애초에 주장 자체에 허점들이 가득하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말을 늘어놓는 엘리후라는 인물은 "나이가 어리다"고 하는데, "어리다"란 말 그대로 횡설수설을 한다. 어쩐지 사업용 부적 (...) 취급받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구절은 좀만 신경써서 읽어봐도 도대체 이게 뭔 소린가 싶은 헛소리다. 

계속해서 반박됨에도 불구하고 욥에 대한 다굴은 끝이 나지 않을 듯 하다가, 하느님이 나타나 선한 사람 인증을 하고 인민재판을 펼친 자칭 친구들을 꾸짖는데, 그 요지만 정리하면, "지식은 진리가 아니기에 결국 '모름'이다. 너희들이 지식은 많다만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럼 결국 모르는 것이지 않느냐? 그럼, 대관절 무얼 안다고 욥을 까고 있는 거냐?"가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는 것에 대한 꾸짖음이 이어지는데, 이것의 요지도 욥의 자칭 친구들과 비슷하긴 하지만, 욥이 선한사람, 곧 하느님의 종이라는 배경이 있기 때문에, 사실은 굉장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27] 다만, 자세한 내용은 역시 율법사들이나 알 법한 내용들이라... 참고로, 욥기에 사용되는 기법은 유대 랍비들은 알아듣지만[28], 랍비들의 경우 "욥이 도대체 누굴 지칭하는 것인가?"라는 문제 때문에 역시 완전한 해석은 못 해준다.

욥기의 제일 큰 문제는 진정한 정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해석이 되게 되어 있는데 (욥기 8장 3절 같은 식), 정작 그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중간 중간 나온다는 것이다. 성경 내용의 상당수가 대관절 무슨 소린지 알 수 없거나,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아보이는 것은 대부분 이 문제 때문이다. 논리의 이해를 위해 필수적인 여러 가지 명제들이 "알아서 찾으슈" 같은 느낌으로 죄다 누락되어 있으니 정상적인 소리로 들리면 그게 더 이상하다.[29] 그나마 어떻게든 핵심적인 배경논리를 찾아 넣어도, 세부적인 배경논리들이 누락되면 일단 뭔가 굉장히 논리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기는 한데 뭔소린지는 여전히 모르는 안습한 상황이 이어진다. 제일 유명한 케이스는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 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 (욥기 19장 25절, 공동번역성서). 만약 독자가 하느님이 땅 위에 우뚝 설 수 있다고 믿으면 말 그대로 예수 같은 인물이 상상되겠지만, 그런 하느님을 믿지 않는 독자라면 아리까리 할 만한 구절.

정리하면, 욥기는 상당한 배경지식이 있는 고단수 독자를 위한 흥미로운 마녀사냥 스토리며, 욥을 도와야 할 이들이 돕기는커녕 더 큰 고통을 주고, 욥은 그 고통에 절규에 가까운 저항을 하는 것이 포인트.
6. 트리비아[편집]
물리학자 앨런 모엔은 본서에서 하느님이 욥에게 한 질문들을 현대식으로 바꾼다면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저술했다.
내가 태초에 공간의 중심을 중성자로 채웠을 때 넌 어디에 있었느냐? 알고 있다면 말해보아라. 중성자의 붕괴는 전자와 양성자를 낳고 원소를 생성시키는데 그 중성자 붕괴의 반감기는 누가 정했느냐? 땅에 기초를 세운 방법이 이런 방법이었다고 생각하느냐? 물질은 가속도에 저항할 질량 에너지를 어디에서 얻느냐? 가속도에 저항하는 이유는 또 무엇이냐? 말해봐라, 생각을 하는 두뇌 안에는 무엇이 있느냐? 지금 너는 뇌의 RNA분자가 뇌세포에 화학자극을 가해 생각하게 하며 기억을 만든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인이여, 네 생각은 어디에 있느냐? 역시 뇌에 있느냐??잘못했어요 살려만 주세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욥기 초반 부분을 오마주 형식 일종으로 가져왔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하느님에게 "파우스트 박사 유혹해볼깝쇼?" 하자 하느님이 "그래봐라, 그래봤자 파우스트는 안 넘어갈 것임." 하는 대목이 나온다.

레비아탄과 베헤모스는 욥기에서 언급된 덕분에 네임드 거대한 괴수로서 엄청난 인지도를 얻었고 토마스 홉스가 국가의 본질/기원/조직/형태/발달 따위에 관한 이론을 주제로 저술한 <리바이어던>을 필두로 수많은 창작물에 등장하게 됐다. 중동의 크립티드 함께 유대교 전설에 등장했으나 여기서 언급이 안 되어 완전히 새 된 지즈와는 상이해 대비된다.

대한민국의 플래시 애니메이터 북서니의 플래시 '찔러맨'에 등장하는 사람 중 하나인 스펜타는 욥의 일대기를 그대로 따왔으며 찔러 리메이크판은 기독교 성경 구절을 토대로 재구성했기 때문. 여기서 스펜타는 지구의 신이 되었다. 참고로 북서니의 세계관에서 신은 절대자가 아니라 천사보다 조금 높은 수준으로 간주되고 있다. 작중 주인공인 찔러의 무기의 원래 주인들도 신인데 꼬리 형태의 채찍 주인인 라큄은 물의 신, 물을 검으로 바꾸는 장갑의 주인인 베알제불은 생명의 신 출신이며 친구인 라큄을 배신하고 그의 무기도 빼앗으려다 그에게 최후를 맞았으며 그때의 피로 무기가 오염되었다고 한다.

미션 임파서블 영화 1편에서 욥의 철자가 Job(영어 발음은 조브)으로 '직업, 일'을 의미하는 단어와 철자가 같은데 발음은 약간 다르다는 점을 이용했다. 상관이 'Job'을 언급했을 때 이든 헌트(톰 크루즈)가 몇 시간 삽질하던 것은 Job을 '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이 번역될 때 매끄럽게 살려지지 못해 그냥 '욥'이라고 언급되어 관객 중에는 "'욥'이면 '욥기' 얘기 아냐? 이든이 바보인 듯."이라던 사람도 있었다. 이 같은 패러디는 스티브 잡스와도 엮이곤 하는데, 그중 압권은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내놓은 것. 아예 제목을 대놓고 'The Book of Jobs'라고 썼다. 예수 대신 스티브 잡스가 주인공이고, 성경책 대신 아이패드가 손에 들려 있는 모습을 그려 놓았다.

사우스 파크에 등장하는 카일은 평소에 악행을 저지르던 카트맨이 거액의 유산을 물려 받았는데 자신은 치질로 고통받는 게 분해서 신을 믿지 않게 된다. 그러자 부모가 욥기를 읽어주며 마음을 돌리려 했는데 카일은 왜 하나님이 사탄한테 증명하려고 그런 끔찍한 짓을 하냐며 화를 냈다. 나중에 카트맨이 IRS에게 물려받은 돈을 죄다 세금으로 뜯기는 걸 보고나서 신앙을 회복한다.

반응형

댓글